가로수길이 뭔데, 아직도 난리야?
‘가로수길이 뭔데 난리야?’ 올 초 광고회사 티비더블유에이(TBWA)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을 통해 라이프 트렌드를 분석한 책 제목이다. 6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 제목을 조금 수정한다면 이 정도가 될 법하다. ‘가로수길이 뭔데 아직도 난리야?’ 신사동 제이(J)타워에서 압구정동 현대고등학교까지 불과 200미터 남짓한 이 짧은 길이 최근 1, 2년 새 이른바 ‘트랜드 세터’들을 집결시키는 최고의 뜨거운 거리로 자리잡았다. 가로수길에 새로 생기는 카페나 식당은 잡지나 인터넷 블로그에 거의 실시간으로 소개되고, 거기 가면 홈쇼핑 화보 촬영을 하는 카메라를 한 블록 건너 하나씩 볼 수 있다. 또한 이 거리의 사이사이 골목으로 새로운 가게와 카페들이 하루 걸러 하나씩 새로 문을 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로수길의 묘사에는 ‘유럽풍’이라거나 ‘강남 속의 강북’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유럽풍이라고 하는 건 마치 파리나 다른 유럽의 도시처럼 접이문으로 활짝 열리는 노천카페들이 많기 때문이다. ‘강남 속의 강북’은 좀더 미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다. 홍대 앞만큼 분방하거나, 청담동만큼 화려하지 않지만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자유롭고 편한 느낌으로 스타일이 연출된 곳이 많기 때문이다.
어떤 거리가 뜬다는 건 단순한 이치이면서 단순치만은 않은 배경이 깔려 있다. 이 길이 부상한 건 단순하게 말해 그 곳에 진입한 가게 주인들의 판매 전략, 즉 장삿속이 먹혔다는 의미다. 그래서 주말에 차려입고 카메라를 챙겨 가로수길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기껏해야 파리의 뒷골목을 흉내내는 거 아냐?’라고 비난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 비난은 할렘에서 태어난 흑인도 아닌데 힙합은 해서 뭐해?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이태원과도, 홍대 앞과도, 청담동과도 다른 방식으로 가로수 길이 사람들을 사로잡은 건 사람들이 지금 원하는 것, 꿈꾸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잘 맞아떨어졌다는 이야기다. 길을 걸으며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건 새로 뜨는 음식과 옷구경이기도 하지만 지금 바뀌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추구하고 싶은 즐거움을 엿보는 것이다.
물론 생각은 자유다. 짧은 길에 엄청난 의미 부여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혼자서 앞이 탁 트인 야외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한두 시간 맘 편하게 책을 읽는 게 괜한 젠 체인 것처럼 꼬아 보이지 않는다면 또는 그런 걸 좋아한다면 가로수길은 괜찮은 동네다. 아주 고급스러운 옷이나 아주 값싼 물건을 원한다면 백화점 명품관이나 동대문에 가야겠지만 그 중간에서 조금 색다른 옷이나 남다른 소품 등을 사고 싶어도 구경올 만하다. 무엇보다 가로수길은 그저 길이다. 우거진 은행나무와 적당한 폭의 인도가 쭉 뻗은 길이다. 신사동이나 압구정동에 일이 있을 때 이 길을 잠시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번잡한 도시 생활 사이의 아주 사소한 즐거움은 누릴 수 있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떼돈 벌기보단 ‘내 가게는 내 식대로’
화랑가로 출발한 가로수길 변천사는 변화하는 시대 흐름의 한 표상
태초에 가로수길에 가로수가 있었다. 누가 언제 식수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울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잎이 우거진, 연륜 있는 가로수길의 은행나무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가로수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로수길의 가장 인기 있는 카페이면서 가로수길 스타일의 시초가 된 ‘블룸 앤 구떼’의 조정희 대표가 청담동에서 베이커리 스튜디오를 하다가 이곳에 카페를 차리게 된 데도 이 가로수가 한몫했다.
‘블룸 앤 구떼’와 ‘19번지’가 양대 아이콘
“입주 건물이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나오게 됐어요. 옆에서 꽃집을 하던 진숙씨와 같이 카페를 차려볼까 하던 참에 이곳에 작업실이 있던 신경옥 선생이 가로수길로 오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엄두를 못 냈죠. 당시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무척 썰렁했거든요.” 그런데 듬직한 가로수들과 넓직한 인도가 있으면서 번잡하지 않은 이 거리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개방적인 파리의 동네 카페 같은, 장소를 꾸미기에 나쁘지 않은 자연 조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플로리스트 이진숙 대표와 함께 2004년 10월 이곳에 문을 열었다.
블룸 앤 구떼와 이곳이 문 열기 열흘 전 옆에 문을 연 스타일리스트 신경옥씨의 바 19번지는 가로수길이 오늘날의 풍경을 갖기까지 양대 기둥이 된 곳이다. 신경옥씨는 블룸 앤 구떼뿐 아니라 싸이의 엄마인 김영희씨가 이곳에 문을 연 식당 ‘코지’ ‘콰이 19’ ‘모던 밥상’ 등을 꾸미면서 가로수길의 색깔을 내는 데 큰 구실을 했다.
두 가게가 문을 열면서 가로수길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기 전 가로수길은 오랫동안 유달리 부침을 많이 겪어온 화랑가이자 패션 골목이었다. 1988년 문을 연 예화랑은 가로수길의 무게중심과도 같은 존재.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갤러리들이 문을 열었다가 아이엠에프의 찬바람을 맞고 줄줄이 문을 닫기도 했다. 여기에 돈 없고 실력 있는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들어왔다. 2007년 파리 컬렉션에 진출한 디자이너 정욱준씨는 아이엠에프 직후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가로수길에 5평도 안 되는 자신의 숍을 차렸다. 물론 정욱준씨나 서상영 디자이너처럼 가로수길에서 터를 잡고 커리어를 쌓아 성공한 인물도 있지만 수많은 디자이너 숍 역시 2000년대 중반까지 들고 나고를 반복했다. 그러나 가로수길 터줏대감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이렇게 다양한 시기에 가로수길을 채웠던 예술인들이 오늘의 가로수길을 만들어낸 기반이 됐다고 말한다. 98년 아내인 최은경 디자이너와 여성용 오트쿠튀르 숍 누에를 열어 성공시킨 박성대 대표는 “디자이너나 스타일리스트 등 가로수길 주변에 사무실이나 작업실을 둔 예술계 종사자들이 일하면서 쉬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까다롭고 다른 걸 원하는 취향이 쌓여서 지금의 색깔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아티스트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가로수길을 아티스트의 거리라고 볼 수는 없다. 요즘 가장 잘나간다는 건 많은 ‘손님’들이 찾는 상업적 지역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로수길 사람들이 돈을 버는 방식은 분명히 최대한의 효율로 극대화된 이익을 남기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지난해 블룸 앤 구떼의 프랜차이즈 제안을 받고 고민했던 조 대표의 말에서 가로수길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여기 공간이 넓지 않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수익성이 생각만큼 좋지는 않아요. 그래서 프랜차이즈 제안을 받고 궁리를 했는데 카페는 분위기고 문화잖아요.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우리 둘의 손이 미쳐서 지금의 색깔이 나오는 거거든요. 앞으로 다시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접었죠.”
대규모 공사중인 ‘스타벅스’에 대한 고민
돈을 버는 데 관심이 없다면야 거짓말이겠지만 떼돈을 벌기보다는 내 가게는 내 식대로 끌어가겠다는 게 가로수길 가게들의 겹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로수길 카페에 가면 블룸 앤 구떼나 카페 앨리처럼 가게 주인이 직접 서비스를 하는 집도 흔하다. 또 일요일이나 휴일에 문을 닫는 집이 태반이기 때문에 잘나가는 거리라는 상찬이 무색하게 일요일 오후가 비교적 한적한 것도 가로수길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느긋한 가로수길의 공기에는 가게 주인들의 다른 생각, 좀더 확장하자면 성공한다는 것,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해 변하는 사회적 기류까지 스며들어 있다. 블룸 앤 구떼나 프랑스 수입 소품점 엑서사이즈 드 스타일, 패션 숍 아란 등 가로수길에는 해외 유학을 다녀온 주인들이 많다. 그들이 끌어온 건 이국적 인테리어만이 아니다. 가로수길을 분석한 <가로수길이 뭔데 난리야>는 ‘사’(士·자격증)의 시대는 갔고, 나만의 것을 찾는 ‘가’(家·한 분야에 정통한 사람)의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박사가 되려고 유학을 가고 판검사가 되는 게 성공의 지표였던 시대를 빵이든, 꽃이든, 패션이든 취향의 전문가들이 바꾸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가로수길은 변하는 시대의 한 표상으로도 읽힌다.
물론 가로수길에도 고민은 있다. 가로수길 동네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한숨을 내쉬는 게 가로수길 들머리에 대규모 공사를 하고 있는 스타벅스다. 스타벅스뿐 아니라 커피빈, 크라제 버거 등 벌써부터 가로수길은 대자본의 후광을 등에 업은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하나씩 입성하고 있다. 결국 스타벅스 옆 크라제 버거 식으로 이어지는 거리가 된다면 지금의 가게 주인들은 팔지도 않을 야생화 화분을 부지런히 노천에 가져다 놓을 수고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 역시 카메라를 들고, 또는 책 한 권을 들고 구태여 가로수길을 찾을 이유는 없어질 것이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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