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강승민] 대종상이나 청룡 영화제 같은 시상식이 열리는 날이면 인터넷에는 실시간으로 ‘○○ 입은 조인성’이라든가 ‘XX 신은 전도연’ 같은 사진이 올라온다. 스타들은 예외없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해외 명품으로 치장한다. 말 그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대로 이런 상품 대부분은 ‘협찬’이다. 명품 브랜드에선 광고·홍보 효과 때문에 스타들에게 자사 브랜드의 옷을 입힌다. 어떤 여배우는 드라마에 생산직 공장 근로자로 출연하면서 드라마 속 평상복을 해외 명품으로 도배해 욕을 먹은 적도 있을 만큼 ‘스타의 옷=명품 브랜드’는 일반적인 공식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에도 틈새가 있다. 드라마·CF에 나왔다고 무조건 명품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른바 ‘동대문 대박 상품’이 그 주인공이다. 명품보단 한참 싼 가격 때문인지 스타들은 동대문 옷을 협찬받기보단 사서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협찬이든 아니든 스타들이 입은 옷은 ‘스타 효과’로 시장에선 명품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이들은 어떻게 ‘동대문 명품’이 되었나.
튀는 디자인 개발에 전력투구
요즘 전파를 타고 있는 LG전자의 휴대전화 광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모델 김태희씨가 깜찍 발랄한 춤을 춘다. 춤추는 김태희씨가 신은 구두는 해외 명품이 아닌 ‘시장 브랜드’다. 동대문시장에선 명품으로 통하는 구두 ‘가부끼’ 얘기다. 도매 가격으론 7만원대, 소매로는 11만원 정도에 팔린다. 2만~3만원짜리가 대부분인 동대문 제품 중에선 초고가인 셈이다. 2006년 인기리에 방영된 MBC 드라마 ‘궁’의 윤은혜씨도 이 브랜드 구두를 신었다. 평민 윤은혜가 아닌 황태자비 윤은혜의 구두였다. 어떻게 ‘시장 브랜드’가 황실 패션이 됐을까.
가부끼 김상엽(37) 사장은 “구두굽은 다른 명품 브랜드와 전혀 다르게 파격적으로 만들고 색깔도 과감하게 사용한다”고 비결을 설명했다. 이를 위해 20대 디자이너 7명이 시즌별로 150가지 이상의 구두를 디자인한다. 다른 업체의 경우 1~2명의 디자이너가 있는 것에 비하면 디자인 개발에 역량 대부분을 투입하는 셈이다. 디자인팀에서 처음 내놓은 디자인 가짓수는 300개가 넘는다. 이 중에서 제주도 등 전국 거래처 사람들과 함께 품평회를 열고 여기서 통과된 디자인만 최종적으로 시장에 내놓는 시스템이다. 이렇게 생산된 가부끼의 구두는 현재 전국 500여 개 ‘보세 구두 매장’에서 팔리고 있다. 자매 브랜드인 ‘에이미’ ‘교교’ ‘송’까지 추가로 내놨다.
시장 구두가 스타의 발을 장식하는 과정은 이렇다. 먼저 수천 개의 매장 사이사이를 누비는 도소매업자들 눈에 들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다른 가게에선 잘나가는 디자인을 복제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원조’를 따라가긴 힘들다. 결국 ‘원조가 여기’하는 식으로 다시 한 번 입소문이 난다.
다음으론 소매 고객들이 뒤따른다. 이들 중엔 유행 흐름을 먼저 파악하는 스타일리스트가 대박 행진의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한다. 유명 연예인의 스타일리스트들은 동대문 시장을 돌며 ‘나만의 아이템’을 찾는다. 스타일리스트 서수경(25)씨는 “1주일에 두 번씩 동대문 시장을 찾는다”고 했다. “그때그때 눈에 띄는 것은 꼭 사둔다”는 그는 “어떤 촬영에서든 ‘내 색깔’을 드러내기 위해서 독창적인 아이템이 필수다. 동대문엔 잘 살펴보면 개성 만점인 제품들 천지다. 발품이 많이 들긴 하지만 동대문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 때문에 자주 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씨는 “동대문 시장 구석구석을 잘 알아야 유능한 스타일리스트가 될 수 있다”며 “어떤 상가, 어떤 매장에서 어떤 물건을 살 수 있는지 꼼꼼하게 파악하고 있지만 영업 비밀이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다”며 웃었다. 그는 “지금까지 동대문에서 그때그때 산 구두나 액세서리를 광고 촬영할때 사용했는데 매번 구두를 신어 보거나 액세서리를 착용해 본 스타들이 탐을 냈다”고 귀띔했다. 스타일리스트뿐만 아니라 연예인들도 직접 쇼핑에 나선다. 엄정화·이효리·하지원·장나라씨는 동대문시장 상인들 눈에 자주 띈 스타들이다.
어떤 브랜드와도 겹치지 않아
남성 듀오 ‘클론’의 구준엽(39)씨가 운영하는 ‘엘렌.에이’도 동대문시장에선 명품 대접을 받는다. 동대문 제일평화시장에서 2001년 문을 열었다. 연예인이 차린 옷가게라며 초창기부터 주목을 받긴 했지만 8년째인 현재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따로 있다.
10일 오후 시장에 옷을 보러 나온 회사원 이수용(33)씨는 “드라마‘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공유씨가 입고 나온 옷이 여기 제품이라고 여자 친구가 알려 줬다”며 “당연히 해외 명품인 줄 알았더니 의외였다”고 말했다. 공유씨가 이 드라마에 입고 나온 옷의 절반쯤은 이 브랜드의 것이다. 공유씨의 옷도 협찬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구입한 것이다. 구준엽씨는 “시장 브랜드여서 협찬할 물건도 많지 않다. 게다가 내가 연예인이어서 대놓고 ‘내 옷 좀 사라’고 하기도 힘들다. 그냥 가게에 자주 들르는 스타일리스트가 알아서 골라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옷이 어떻게 수백, 수천개의 동대문 옷가게 중에서 주목받게 됐을까. 구씨는 “조금씩 만들면서 소매 끝이나 깃 같은 작은 부분에 더 신경을 쓰는데 그러다 보니 국내 어떤 브랜드와도 겹치지 않는 디자인이 됐다”는 것을 비결로 꼽았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구씨의 옷가게는 문을 연 지 8년 만에 여성복도 런칭하고 온라인 쇼핑몰도 따로 차릴 만큼 성장했다.
동대문시장의 또 다른 스타 ‘메리제인스토리’도 비슷하다.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윤은혜씨가 자주 입고 나오면서 입소문이 났다. 20대 여성들이 주로 찾는 이 브랜드는 2만원부터 10만원 정도의 셔츠·니트·원피스 등이 주력이다. 독특한 프린트의 티셔츠 등이 인기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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