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이도은.이영희.권혁재]
지하철 몇 번째 칸에 타야 환승 구간이 가장 짧은지, 주말엔 어디에 주차하면 공짜인지…. 시간 아끼고 씀씀이 줄이는 ‘서울살이 노하우’, 참 차고 넘칩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 볼까요. 미술관 가지 않고도 ‘작품’을 만나는 방법입니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도시 갤러리 프로젝트’ 덕에 지난해부터 ‘예뻐진’ 공공 장소들이 꽤 생겨났습니다. 지하철역·도서관·시장같이 서울에 살다 보면 한번쯤 들를 법한 곳이랍니다. 처음엔 좀 실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깔끔하고 세련된 갤러리는 아니니까요. 그저 삭막한 도시에 작은 쉼표처럼 생각하세요. 조금씩 ‘캔버스’로 변신하는 서울, week & 이 안내합니다.
글= 이도은·이영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1 서울 농학교, 어린이도서관
주말 오후 아이들과 함께 삼청동, 청와대 인근으로 산책을 나섰다면 자하문 터널 앞 사거리에 있는 서울 농학교에 들러보자. 정문 앞 골목 한쪽에는 올해 1월 완성된 벽화작품 ‘수화-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학교를 찾은 손님들을 맞는다. 배영환 작가와 농학교에 다니는 청각장애학생 180여 명이 ‘내 일상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3개월간 작업한 이 작품엔 ‘진심’이 담겨 있다. 학생들은 작은 타일 속에 만화 캐릭터, 엄마 얼굴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리고 남기고 싶은 말을 적었다. ‘꿈꾸는 데는 늦음이 없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행복해진다’ 등 희망을 부르는 내용이 있는가 하면 ‘엄마 사랑해요’ ‘I♡영숙’ 등 개인적인 고백도 있다. 한글 자음과 모음, 알파벳의 수화 표현을 따라 해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배워 보는 것도 좋을 듯.
농학교 앞 큰길을 쭉 내려오면 사직공원 옆 서울시립 어린이도서관 인근이다. 2001년까지 경찰청 직속 특수수사과, 일명 ‘사직동팀’이 거주했던 이곳은 그동안 4m에 달하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그러나 올해 초 콘크리트 벽을 헐고 투명한 색색의 원통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담을 세웠다. ‘투명변조기’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을 만나면 원통을 통해 정문 맞은편에 있는 사직단을 꼭 한 번 들여다보라. 원통의 크기와 색깔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이 재미있다.
2 동대문 ‘동화시장’
서울을 좀 안다는 사람도 ‘동화 시장’ 하면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옷을 사고파는 시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화시장에선 지퍼·단추·스팽글 등 각종 의류 부자재를 팔고, 미완성된 옷에 그것을 장식하는 작업을 한다.
동대문 쇼핑이 지루해질 때쯤 밀리오레 사잇길로 들어가자. 100m쯤 가다 보면 5층짜리 상가가 보인다. 사람들은 바쁘게 물건을 실어 나르고 ‘웅웅’ 기계 소리는 쉼 없이 들린다. 700여 개 점포가 빼곡히 들어찬 시장의 첫인상은 칙칙하고 답답하다. 그런데 이 평범한 재래시장 구석구석에 작품이 숨어있다. 건물 벽면 곳곳에는 상인들을 코믹하게 묘사한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고, 실제 그곳에서 일하는 상인 아주머니와 경비원 아저씨를 그린 방화문도 눈에 띈다. 그 외에도 가위바위보 모양의 손이 달린 의자, 등받이를 옷 부자재로 만든 ‘거인 의자’ 등이 층간 계단마다 놓여 있다. 팝 아트가 연상되는 재미있는 전시품들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상인들이 직접 만든 작품. A4 크기의 천에 재봉·자수 기술을 이용해 본인들의 이름을 개성 있게 꾸며놨다(‘상인, 당신의 이름을 찾아주세요’). 시장이 문 연 이후 40여 년간 이름보다는 ‘XX집 아줌마’로 불려온 시장 사람들을 새롭게 보는 기회가 된다. 날이 좋다면 옥상도 들러보자. 부자재 시장답게 지퍼와 단추를 본뜬 벤치가 있어 사진 찍기에 좋은 장소다.
3 신용산 지하보도
‘삐익~쉬익~’ 스피커에선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땅 밑이다 보니 울림이 크다. 조명은 그리 어둡지도 밝지도 않다. 160m에 걸친 양쪽 벽면은 끝없이 올록볼록하다. 몽롱한 느낌까지 든다. 용산역과 전자상가를 잇는 신용산 지하보도는 짧은 시간여행을 선물한다. 그곳에선 뿔종다리·넓적부리도요·비단벌레와 플로피디스크·386컴퓨터·겜보이를 만날 수 있다. 지구에서 사라져 가는 동식물과 십수 년 만에 퇴물이 돼 버린 전기전자 제품들을 판화로 새겨 벽면에 가득 붙여놨다. ‘S-peed! 그곳’ 이라는 작품명이 정신없이 바쁜 삶의 ‘스피드’에 짬을 내 보라는 듯하다. 최첨단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비는 지상과도 크게 대비된다. 걷다 보니 지하보도 하면 연상되는 음습한 이미지는 사라지고 어느새 작은 갤러리에 와 있는 듯하다.
망원동과 성산동에 가면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동네예술가 프로젝트’는 예술을 특별한 이들의 것이 아닌 옆집 아저씨, 윗집 아줌마의 일상적인 생활문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에서 시작됐다. 2, 6호선 합정역 8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16번을 타고 망원유수지에 내리면, 노랑·빨강으로 예쁘게 칠해진 컨테이너 박스가 눈에 들어온다. 마을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자리 잡은 ‘동네 예술가센터’다. 생활 속에 녹아든 작품들인 만큼 눈길을 확 사로잡는 매혹은 없다. 대신 함께하는 기쁨과 실용성이 장점이다. 동네 주민들이 아침저녁 운동을 하는 유수지 바닥에는 ‘망원 유수장에서 놀자’라는 제목으로 예쁜 그림을 그려 넣었다. 16번 마을버스 종점 인근에 있는 낡은 공동주택의 벽면을 꽃으로 장식하고(‘꽃밭주택’) 썰렁하던 성미산 어린이집 담은 따뜻한 벽화로 장식했다. 모두 작가와 마을 주민이 함께 의논하고 공동 작업한 작품들이다. 망원동과 성산동 곳곳에 숨어있는 더 많은 작품들은 홈페이지(www.dongneartist.com)를 통해 볼 수 있다.
5 지하철 3호선 ‘옥수역’
‘옥수역, 옥수역,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열차 첫 칸이나 마지막 칸에 있다면 감상을 준비할 때다. 역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하행선 승강장 벽에선 원색의 선들이 질주한다. 내린 뒤 뭐였을까 보니 손톱보다 조금 큰 타일이 빈틈없이 붙어 있다. 점점의 타일이 속도를 타고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작품명은 ‘스트라이프: 속도’.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다. 지상 구간의 축복이다.
이것 말고도 옥수역에는 볼거리가 꽤 있다. 먼저 하행선 승강장의 커피잔 모양 의자가 눈에 띈다. 어디론가 바삐 떠나는 사람들이지만 그곳에 앉아 있는 걸 보니 왠지 모를 여유가 느껴진다. 광고 전단지가 들러붙어 꼬질꼬질한 반대편 의자와 비교해 보면 그 산뜻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역 바깥 동호대교를 받치는 교각은 바코드 무늬를 넣어 화려해졌고(‘Barcode:빛의 문’), 역으로 들어서는 계단에는 국자를 꽂아 놓은 듯한 노란 조형물(‘화분?’)이 놓여 눈길을 끈다. 무료 자전거 대여소(2298-8003)가 가까워 역을 구경하고 한강변을 달리는 코스도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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