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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죽은 영혼을 위한 레퀴엠

falcon1999 2010. 4. 6. 15:49

 

 

백색의 고성, 크락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


 

 

 회랑 

 

 

죽은 영혼을 위한 레퀴엠...크락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

 

회랑은 높고 깊었지만 어두웠다. 이끼 낀 돌들로 차꼬처럼 물린 성채 깊은 곳에 빛이 든다는 것은 어딘가에 숨통이 터져있다는 의미다. 창이라기보다는 구멍에 가까운 비좁은 틈새를 통해 한줄기 빛이 쏟아진다. 삼엄한 어둠의 울을 벗어난 것이다. 깊고 으슥한 곳일수록 명암은 뚜렷하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분명했던 시간들 또한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음험하고 어두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싸움의 현장에서 그 명료한 흑과 백, 적과 나, 삶과 죽음을 만난다. 모든 성城은 싸움을 위해 세워지고 싸움에 의해 허물어진다. 죽음이 일상인 싸움터에서 피는 한 모금의 물보다 천하다. 죽음이 지천인 성은 그렇기에 늘 비극적이다. 나는 성에서 내가 살기위해 적을 죽여야 하는 비정한 인간의 시간과 마주한다.

 

 

마른 번개가 치던 날 밤 하마hama 

 


 

마른번개가 하늘을 찢어내던 밤, 시리아 중부의 작은 도시 하마hama는 밤을 뒤척였다. 바람이 야자수를 휘저으며 지평선 깊은 곳에서 낮은 구름을 몰고 왔다. 간혹 몇 방울의 비가 뿌리긴 했지만 금방 젖고 얕게 스민다. 숙소에서 체스를 두던 여행자들의 눈은 체스판에 머물렀지만 귀는 여전히 바깥으로 열려있다. 크락 데 슈발리에서 밤늦게 돌아온 여행자들의 풍문 탓에 숙소를 지키고 있던 이들의 마음이 체스판에 머물지 못한다. 크락 데 슈발리에로 가는 길에 폭우가 내려 길이 끊어지고 발이 묶여 돌아오지 못하는 여행자들도 있다는 뒤숭숭한 소식들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다음 날 나와 함께 크락 데 슈발리에로 가기로 했던 필 오스틴Phil Austin이 낮은 탄식을 한다. 만약 다음 날까지 폭풍이 계속된다면 크락 데 슈발리에로 가는 길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성을 함께 찾은 오스틴과 이브

 

 

다음 날 아침, 날은 여전히 어둡고 구름도 낮게 깔려 있었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같은 숙소에 묵던 프랑스인 마리 이브Marie eve가 우리와 합류했다. 하마의 남쪽인 홈즈Homs로 가서 버스를 다시 갈아타고 목적지인 크락 데 슈발리에로 가야한다. 도로는 우려와는 달리 멀쩡했다. 간밤의 비는 요란했지만 땅을 흠뻑 적시기엔 짧고 야위었다. 홈즈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쯤 달리자 산 정상에 우뚝 솟은 백색의 성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1170년 1차 십자군 원정으로 예루살렘이 기독교인의 손에 들어간 후 크락 데 슈발리에는 성 요하네스 기사단에의 손에 의해 완공된다. 이 성이 유명한 이유는 약 9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중세 유럽 성의 규모와 형태를 거의 완벽히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성과 요새가 그렇듯 크락 데 슈발리에 또한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아름다움의 근거는 균형과 조화, 힘 대한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첫 눈에도 성은 시선을 압도하는 단호한 의지와 위엄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을 공략해야하는 적들에게 성은 물리적인 힘 이상의 경외와 공포를 심어준다. 동시에 성을 지켜야 하는 이들에게 이곳은 어떤 적이라도 으깨고 벨 수 있는 신념의 근거가 된다.

 

 

 

   

처음 이 언덕에 성을 세운 이들은 쿠르드족이었다. 이후 이슬람 왕국의 손에 넘어가 1031년 홈즈의 성주가 지금의 내성內城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60년 뒤 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인 시리아 일대는 잔혹한 파괴와 약탈이 벌어지는 살육의 현장으로 변한다. 피와 원한의 역사가 시작된 1096년. 십자군은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원정을 떠난다. 보이지 않는 성스러움을 위해 이교도의 눈을 파고 죽은 것을 찬양하기 위해 살아있는 것의 목을 베었다. 죽음 뒤의 천국을 세우기 위해 지상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양편 모두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성전聖戰이었지만 싸움이 휩쓸고 간 뒤 수레를 채운 것은 추악한 욕망이었다.

 

 

 

첫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후 3년 만인 1099년 기독교 세력은 그들의 숙원이었던 예루살렘을 손에 넣는다. 그 와중에 크락 데 슈발리에도 십자군의 지배하에 들어가지만 이후 40여년 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다. 이 성이 지금의 크락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142년 성 요하네스 기사단-로도스 또는 몰타 기사단으로 알려진 성지 순례자를 위한 구호 기사단-이 이곳에 거점을 두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크락 데 슈발리에는 다름 아닌 ‘기사의 성’을 의미한다.

 

 

 성의 내부 

 

이곳에 주둔한 요하네스 기사단은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수호하기 위한 철옹이 필요했다. 내성 바깥에 외성을 쌓고 해자를 깊이 파는 등 성城은 점차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해갔다. 공사를 시작한지 30년 만에 성은 드디어 완벽한 모습을 갖추지만 불과 17년만인 1187년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영웅 살라흐 앗 딘-살라딘이라고 알려진-에 의해 함락된다. 물론 크락 데 슈발리에는 거듭된 이슬람의 공격을 굳건히 버텨냈다. 한 때 살라흐 앗 딘은 외성을 공략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거두지만 완전히 성을 손에 넣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이후 거듭된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 이슬람 제국과 몽골제국의 서진에 맞서 기독교 세력의 보루로  싸우지만 결국 십자군의 몰락과 함께 100년 동안의 피가 튀기고 살이 찢기는 전쟁도 끝을 맞이한다.

 

 

 성의 입구


 

마을에서 성까지 운행하는 돌무쉬-마을버스와 비슷한 셔틀버스-를 타고 5분 쯤 언덕을 오르자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성은 멀리서 보는 것보다 육중하고 위압감을 느낄 만큼 거대해 보인다. 성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높이 20m 남짓한 육중한 외성이 외곽을 두텁게 감싼다. 외성의 모서리와 변의 중앙에는 원통형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깊은 해자가 외성과 내성 사이에 파여 있다. 설혹 외벽 공성이 성공한다 해도 파성추와 같은 덩치 큰 공성기가 들어설 땅이 없다. 게다가 내성은 바깥을 둘러싼 외성보다 오히려 높다. 살라흐 앗 딘이 외성 공략에 성공한 이후에도 후퇴를 결정한 배경에는 당시 이슬람 제국의 속사정도 있었지만 바위처럼 견고한 내성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외성과 내성 사이의 해자

 

일반적으로 성이나 요새는 시야가 탁 트인 언덕이나 높은 산 위에 위치한다.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방어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대가 높다고 해서 모든 점이 유리한 것은 아니다. 방어가 쉬운 만큼 고립되기 쉽고 공성전이 길게 이어지면 보급에 큰 문제가 생긴다. 식량은 포위에 대비해 비축을 할 수 있지만 물은 그렇지 못하다. 다행히 우물이 있다면 마실 물이야 어떻게 해서든 버틸 수 있겠으나 시리아와 같은 메마른 지역, 그것도 황막한 바위산에 수천의 군사를 먹일 큰 우물이 있을 리 없다. 해자는 이 같은 불리함을 해결하는 열쇠다. 적에는 거대한 덫과 같은 장애지만 성안 사람들에겐 보호막이자 거대한 저수지이기도 하다. 또한 해자는 성을 부수기 어려울 때 등장하는 땅굴을 사전 차단하는 역할도 한다.

 

 

    

성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십자군을 시리아 땅에서 몰아낸 맘루크 왕국의 바이마르스를 찬양하는 아랍어 문구가 성을 찾은 이들을 맞이한다. 어둡고 축축한 굴을 지나면 내성으로 들어가는 회랑이 이어진다. 하늘에서 바라본다면 성은 등고선 같은 건물의 외형이 한 눈에 들어오지만 막상 내부로 들어서면 길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몇 차례 같은 길을 헤맨 후에야 비로소 성의 윤곽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감옥과 망루, 병사들의 방과 부엌과 수도에 이르기까지 성은 작은 도시와 같다.

 

 

 

 

성을 지키던 이들의 기쁨과 탄식이 이끼가 무성한 벽 저편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아니 흐느끼는 듯한 구슬픈 여자의 노래 소리가 회랑 저편에서 들려온다. 갑작스런 환청에 소름이 돋고 오싹한 기운이 감돈다. 어둠 저편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음성은 끊어질 듯 가냘프게 이어진다. 미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떨림이다. 소리의 흔적을 따라 회랑을 따라 걷는다. 볕이 비교적 잘 드는 회랑 몇 개를 지나자 노래 소리는 더욱 분명해졌다. 어떤 여자가 이 차가운 고성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회랑과 이어진 아치형 입구가 보이고 그 안에 제법 널찍한 방이 있다.

 

 

 

 

깊숙한 자궁처럼 아늑한 어둠의 안쪽, 노래는 그곳에서 들려왔다. 관광객 몇이 방 안에서 서서 그 노래를 듣고 있다. 그들의 시선의 끝에 뒤돌아선 소년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른 키의 세 배쯤 되는 안으로 움푹 들어간 공간에서 소년은 벽을 마주한 채 한 손을 귀에 대고 높고 여린 음성으로 노래를 부른다. 소년의 노래는 벽의 굴곡을 타고 부드러운 공명으로 방안을 채운다. 사람들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 소년을 바라본다. 아무런 의미 없는 구음口音인 듯도 하고 깊은 사연을 지닌 노래인 것도 같다. 다만 수많은 싸움과 생명들이 스러져 간 그 자리에 핀 이끼처럼 소년의 노래는 성안으로 스며든다. 아니 처음부터 성의 일부였는지도 모른다. 죽어간 영혼을 위한 진혼곡으로.....

     

 

 노래를 부르던 소년 

 

*** 예전에 포스팅했던 크락 데 슈발리에를 고쳐씁니다. 사진은 중복되나 내용은 전혀 다르니 양해 바랍니다.

출처 : 소심한 여행
글쓴이 : 하피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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