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하려는 것/한복

[스크랩] 한복디자이너 김혜순

falcon1999 2010. 2. 17. 22:58

 
 
“아홉시쯤 어떠세요?”
“9시요? 저녁 아홉시는 너무 늦지 않을까요?”
“아니요, 아침 아홉시요”

출근하려는 사람들로 분주한 평일 아침의 테헤란로.

양복을 입은 샐러리맨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란히 줄지어 초고층 빌딩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그 시간, 같은 테헤란로의 어느 한적한 골목길에 자리한 ‘김혜순 한복’을 찾아갔다. 약도를 인쇄해 들고 갔음에도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아 몇 번을 헤매고 여러 행인들에게 도움을 구한 끝이었다.

러시아워임을 감안해서 약속시간보다 10여분이나 일찍 도착했음에도 김혜순 대표는 이미 사무실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대체 몇 시에 출근하시는 걸까.

"저는 여섯시에 나와요. 늦어도 7시 전에는 문을 열고 오늘 작업할 준비를 시작합니다. 물론 직원들에게 맡길 수 도 있지

만 오늘 보내야 할 것들, 만들어야 할 것들은 직접 챙기는 편입니다. 그렇게 빨리 시작한 대신, 빨리 끝냅니다. 밤을 새거나 새벽까지 일하지는 않아요. 여성들, 그것도 주부들을 주 고객으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일찍 하루를 마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뿐 아니라 고객들에게도 좋은 인상과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비로소 2층에 자리한 사무실을 둘러본다. 시원스레 뚫린 통유리 바깥으로는 정성스레 가꿔진 꽃과 나무들로 가득한 한국식 정원이 보였고, 김혜순 대표가 앉은 책상 뒤로는 각양각색의 곱고 화려한 옷감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사무실 곳곳을 구경하다가 큼직한 액자에 눈이 머물렀다. 한복의 치맛자락을 살포시 잡은 채 얼굴을 감추고 있는 한 여인의 고혹적인 뒤태를 담은 사진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사진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조선 최고의 기생, 황진이였다. 

"황진이라는 드라마의 의상이 퓨전인 줄 알지만, 아닙니다. 기본의 틀은 전혀 변화를 주지 않았어요. 황진이는 16세기 인물이잖아요. 그 당시의 황진이를 대중화시켜야 하는데 그 당시의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요. 거기다가 기생의 옷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제가 변화를 준 것이라고는, 18세기로 끌어올린 것뿐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윤복이나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기생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니까요. 그리고 16세기 옷은 재미가 좀 없어요. 기생이라면 섹시하고 요염하고 그래야 하는데 저고리도 길고 옷 자체가 좀 단조롭죠. 18세기 말, 이때는 저고리가 하염없이 올라갑니다.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드라마 <황진이>의 의상으로 비로소 대중들에게 알려졌지만, 그렇다고 ‘한복 디자이너 김혜순’의 대외활동이 적었던 것은 아니다. 작년 한 해 동안만 해도 중국, 일본, 러시아, 핀란드, 그리고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 각종 패션쇼와 학술강연, 저고리 전시회 등을 쉴 틈 없이 가졌고 국내에서도 창작무용 <춤, 춘향>의 의상을 담당했을 정도로 오히려 그 활동 폭이 대단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원했다면 길가에 크게 이름을 붙여놓았겠지요. 이렇게 골목 깊숙이 자리를 잡고 이름도 작게 만들어 걸었지만 찾아올 사람들은 다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일들을 했는데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황진이>라는 드라마 역시 제가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평소부터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기생이라는 당대의 패션리더들을 주인공으로 한 패션쇼를 했을 뿐입니다. 그걸 보고 방송국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한 것이지요. "

결국 스스로 찾아오게 만드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겁니다.

황진이 의상을 만들 당시에 김혜순씨는 조급한 마음이 컸다고 한다. 한번 입힌 옷은 다시 입힌 적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의상을 선보였음에도 드라마가 끝나가는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드라마를 끝으로 더 이상 드라마 의상을 안 해도 된다, 싶을 정도로 모든 걸 보여주고 싶었다는 김혜순 씨.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아요. 보여주고 싶은 것을 다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여전하답니다. 그래서 저의 관심사는 여전히 기생 옷입니다. 기생 옷을 다시 한 번 표현할 기회가 있다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전혀 새로운 패턴으로 무장한 옷을 보여주고 싶어요. 신비함으로 가득한 우리 옷……치마저고리의 비례에 따라서 변화가 무쌍한 옷은 우리 한복뿐 입니다. 제가 저고리에 관심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죠."

생활한복과 고급한복을 막론하고, 한복을 개량하고 서양식으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간편하게 만드는데 중점을 두는 이 시대에 너무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아닌지 슬며시 의구심이 들었다.

"여태까지 생활한복이라면서 간편하게 만든 옷이 어떻게 됐죠? 맞습니다, 결국 묻혀버렸어요. 어쩌다 그렇게 된 걸까요?
그런데 그러한 변화도 꼭 필요합니다. 고정관념에 갇혀서 변화를 주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인위적으로 변화를 주지 않아도, 우리 한복은 계속 변화해왔다는 거예요. 당대마다 유행이 있었다는 겁니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그 내밀하고 폐쇄적인 규방 안에서도 얼마나 섬세한 변화들이 많았는데요. 보고 싶은 것을 못보고, 가보고 싶은 곳을 못가는 여인네들이기에 그러한 유행과 변화는 훨씬 더 절실했던 건지도 모르지요."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김혜순씨는 몇 해 전 자신이 쓴 책을 한 권 들고 왔다. 책 속에는 우리 한복 저고리의 다채롭게 변화하는 모습이 16세기부터 일제시대 까지 차례대로 펼쳐져 있었다. 김혜순씨는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며 각 세기마다, 시대마다 점점 짧아지는 저고리의 길이와 점점 화려해지는 문양과 원단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그렇게 책 한권을 다 구경하고 나자, 자연스럽게 설명은 저고리에서 한복 자체로 옮겨갔다.

"한복은 평면적인 옷이기 때문에 어떻게 입히느냐에 따라 그 실루엣이 하염없이 변합니다. 한없이 풍성하게 육감적으로 연출할 수 도 있고, 이렇게 확 감아 돌리면 더욱 더 고혹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기모노는 그 상태그대로 입을 수밖에 없지만, 한복은 손으로 치마의 어디를 잡느냐에 따라서도 그 맵시가 달라집니다. 한복은 그렇게 마음을 표현하는 옷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져온 전통이 곧 현대라고 생각한다는 김혜순씨. 그럼에도 현대인들에게 한복을 더 많이 입히기 위해서는 따로 또 필요한 것이 있다며 말을 이어나갔다.

"한복을 시작하면서 20대 후반에 일본에 갔었습니다. 저는 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한복이 너무 싫었거든요. 왜 우리는 이렇게 우리 한복을 천시할까. 그런데 일본에 가서 보니까 일본의 기모노 가게에는 기모노가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혹시나 싶어서 매장 안으로 들어갔는데 역시나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왜 옷이 없냐고 물어보니까, 알았다며 옷을 보여준다는데……옷을 꺼내 오는데만 20분이 걸려요. 무릎을 꿇고 옷을 마치 보물 꺼내듯 꺼내오더니 옷을 펼쳐 보여주는데……한손으로 넘기는 법이 없어요. 이렇게 두 손으로 천천히 옷을 펼치는데……보고 있는 제가 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젊은 김혜순’은 우리 한복도 더 이상 시장에 아무렇게나 걸린 값싼 옷이 아닌, 만드는 사람도 입는 사람도 최대한 예의를 갖춰야 만날 수 있는 옷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보이지 않는, 드러내지 않는 한복 가게를 차렸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은 ‘젊은 김혜순’을 알아주는 이가 드물었고, 골목 구석에 차려놓은 한복가게를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김혜순씨는 자신이 생각하는 한복의 고급화를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먼저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 다음은 최고가 되기 위한, 공부 그리고 또 공부뿐이었다.

"생활한복은 생활한복대로 편하고 친근한 옷으로 발전을 해야 하고, 고급한복 쪽은 고급한복대로 전통을 유지하면서 점점 더 소중하고 귀한 옷이 되어야 합니다. 최고수준의 우리 옷 한 벌을 만들어 소장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일 수 있을 정도로 갖고 싶은 우리 옷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손쉽게 만들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우리 옷이 필요한 만큼, 평생의 단 한번 귀중하고 소중한 그 순간에는 꼭 한번 욕심을 내어 그 순간을 영원으로 간직할 수 있는 찬란한 우리 옷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김혜순씨가 생각하는 우리 한복의 생활화이고 대중화였다.

그렇다면 한복의 세계화는?

"한복은 원래 외국인들에게 어울릴 수 있는 옷이 아녜요. 치마는 길고 저고리는 작기 때문에 하체가 긴 외국인이 입으면 껑충해 보이기만 할 뿐 예쁘지가 않지요. 방법은 하나예요. 외국인에 맞게 변형시켜서 만드는 겁니다. 러시아에서도 그렇게 일부러 외국인 모델들에게 입히고, 대사관 부인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체형에 맞게 변화를 주어 입혔어요. 어떻게 됐을까요?

안 벗어요. 한번 입어보고는 계속 입고 싶다고, 안 벗는 거예요. 정작 우리는 입기 불편하다고 안 입는 옷을 외국인들은 갖고 싶어 하는 겁니다. 우리 한복 고유의 맵시는 고스란히 살리면서도 각 나라의 문화와 전통에 맞게 변화를 줄 줄 아는 열린 마음가짐, 이게 바로 한복의 세계화가 아닐까요? "

출처 : LA 코리아타운에 고풍스런 한옥을 짓자!!!
글쓴이 : 둘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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