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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으로 만든 디저트, 김치로 만든 잼 … 한식을 비틀어라” [중앙일보]

falcon1999 2009. 2. 14. 13:56
 출처: http://news.joins.com/article/aid/2009/02/14/3311369.html?cloc=nnc

“밥으로 만든 디저트, 김치로 만든 잼 … 한식을 비틀어라” [중앙일보]

‘요리계 피카소’ 피에르 가니에르, 한식을 논하다
된장찌개서 숲의 향 느껴져
외국인이 싫어할 거란 편견 버려야
한식, 절대적으로 맛있다

 “한국에서 이런 맛있는 음식을 발견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랍다. 세계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한 요리다.”

‘요리계의 피카소’라 불리는 세계적인 요리사 피에르 가니에르(58)가 한식을 맛보고 내린 평가다. 12일 서울 청담동에 있는 한식당 ‘우리가’로 데려가 한식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부탁하고 세계화의 가능성을 물었다. 세계적인 식당평가지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최고점인 별 세 개를 받은 레스토랑을 파리에서 운영하고 있는 그는 지난해 10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 ‘피에르 가니에르 아 서울(Pierre Gagnaire a Seoul)’을 개점한 뒤 종종 서울을 찾고 있다.


맛에 관한 한 까다롭기로 소문난 이 요리사는 아홉 가지로 이뤄진 코스를 맛보며 “참으로 맛있다(absolument delicieux)” “더 먹고 싶은데 다음 요리를 먹기 위해 참는다” 등 감탄사를 연발했다.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음식을 눈으로 살폈고 입으로 느꼈으며 때로는 손으로 만져보기까지 했다. 접시에 장식된 청보리며 매화꽃 가지도 꼼꼼히 점검했다. 접시에 담겨 나온 음식의 양과 형태에 대한 제안도 아끼지 않았다.

‘우리가’가 평소 손님들에게 내놓는 점심 코스 메뉴 그대로를 가니에르에게 내놓기로 약속했으며, 안정현 사장은 이를 지켰다. ‘우리가’는 한식에 품격을 더해 세계화를 이루겠다는 취지로 2004년 문을 열었다.

“요리 경력이 이제 43년”이라는 가니에르는 “요리는 나 자신이다. 요리를 생각하면 사업이며 돈이며 타인의 의견은 다 잊고 집중하게 된다. 그런 열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요리를 쇼처럼 하는 경향이 세계 곳곳에서 보이는데 이건 진정한 요리가 아니다. 정성과 사랑을 담아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음식의 향연, 그게 진정한 요리다”고 말했다.

식사를 마친 그는 주방을 직접 찾아가 스태프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식당 문을 나서면서 “이 레스토랑에 들어설 때 우리는 남남이었지만 이제 우리 모두는 이 음식을 매개로 친구가 되었다. 이게 바로 좋은 음식의 힘”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당신이 그렇게 맛있어 하는 한국음식이 왜 아직까지 세계화되지 못했다고 보나.

“(한참을 골똘히 생각한 뒤) 한식이 세계 무대에 등장하려면 문호개방 과정을 거쳐야 한다. 레스토랑 운영자들이 서양인 구미에 맞는 음식의 디테일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게 중요한 열쇠다. 오늘 맛본 한식은 서양인에게도 충분히 먹힐 정도로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기존의 한식을 서양인의 입에 맞게 변형했기 때문이다. 한식을 비틀어보는 게 중요하다. 서양인 입맛에도 맞는 한식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 맛본 한식과 가본 한식당의 문제는 뭔가.

“솔직히 한국이 아닌 곳의 한식당은 규모도 작고 어둡다는 느낌이다. 또 불판에서 항상 뭔가를 굽고 있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한국적인 걸 긍정적으로 이미지 메이킹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식을 하는 요리사며 레스토랑 운영자들, 특히 외국에서 일하는 분들은 자신들이 한국의 얼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한국의 문화대사와도 같은 인물이다.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명예를 걸고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을 얻는 한식당이 나오려면 어떤 점이 바뀌어야 할까.

“전통적인 한국 요리를 선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는 게 고수다. 전통을 숙지하되 전통을 뛰어넘는 영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는 43년간 요리를 해왔다. 처음 10년은 아버지가 하는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그저 배우기만 했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 한 단계 도약을 꿈꾸게 됐고, 전통 기법을 뛰어넘었다. 그래서 분자요리(식재료의 질감과 조직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재료를 조합해 만드는 요리)도 만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과 프랑스 요리의 뿌리는 항상 기억했다. 프랑스 요리의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고유의 기본에 충실했던 거다.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도 이런 노력과 태도가 중요하다. 또 음식을 내놓는 방식도 중요하다. (잣과 흑임자가 뿌려진 김치를 가리키며) 이렇게 예쁘게, 또 알맞은 크기로 잘라놓은 김치는 매우 훌륭하다. 모양도 정교하고 맛도 깊이가 있다. 이 레스토랑의 손맛이 김치로 표현되는 느낌이다.”

-어떤 한식당을 다녀봤나.

“한국을 자주 와보지 못했으니 함부로 평가하는 건 오만한 일이다. 한국의 식당도 많이 가보진 못했다. 방문할 때마다 ‘아, 여긴 이렇구나’라는 식으로 배워 가는 입장이다. 섣부른 평가는 금물이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평가해 보자면 소박하고 왁자지껄하며 시골의 느낌도 나고, 따뜻한 인간미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정성과 사랑이 느껴지는 음식이라면 다 맛있다. 정성과 사랑이야말로 음식의 핵심 재료이기 때문이다.”

-된장국과 같은 음식은 냄새가 너무 심해 외국인들은 싫어할 거라 생각하는 한국인이 많다. 이날 식당에서도 된장찌개는 외국인이 좋아하지 않는 맛이라며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된장 뚝배기에 코를 갖다 대고 약 1분간 냄새를 맡은 뒤 눈을 감은 채)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이 찌개에서 오히려 숲의 향을 느낀다. (주인 안씨가 ‘송이와 함께 2년간 묵힌 된장’이라고 설명하자) 그래서 향이 아주 훌륭한 모양이다. 맛이 정교하고 손이 많이 간 음식이라는 인상이다. 소박하지만 요리의 힘이 느껴진다. 외국인들이 이 냄새를 안 좋아할 거라는 건 편견이다. 단지 두부를 너무 작게 썰어내는 바람에 씹는 맛이나 직접 잘라 먹는 재미가 부족한 게 아쉽다. 좀 더 통통하게 잘라서 숟가락으로 잘라가며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함께 나온 밥도 흥미롭다. 밥알이 씹히는 느낌이 일품이고 익힌 정도도 딱 맞다. 이 밥을 맛보며 나는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어떤 상상인가.

“밥으로 디저트를 만드는 거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뜨거운 밥 위에 설탕을 살짝 뿌리고 말린 과일을 잘라서 놓는 거다. 그리고 그 위에 바닐라빈을 장식해 내놓는 거다. 서양인들에게 상당히 먹힐 수 있는 디저트가 될 것이다.”

-서울에 가니에르 레스토랑을 열면서 김치로 마멀레이드(조린 잼의 일종)를 만들고 쌀에 샴페인을 부어 요리하는 등 한식을 가미한 요리를 내놓았는데.

“바로 그것이다. 오늘 맛본 한식에서 새로운 영감을 많이 받고 있다. 이런 한식당에 나의 ‘피에르 가니에르 아 서울’ 셰프들을 자주 보내 맛을 보여야겠다. 그래서 한식의 풍미를 더한 가니에르 요리를 만들어야겠다.”

-오늘 한식에서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은 뭔가. 솔직히 평가해 달라.

“(웃으며) 없는데. (그래도 찾아보라고 재차 묻자) 굳이 꼽자면 글쎄, 기존의 전통방식을 고수한 게 아쉽다. 전통을 기본으로 개인적 안목과 시각을 더해 재구성했으면 좋았을 듯싶다. 예를 들어 이 반찬들을 보자. 모두 맛은 있지만 양이 너무 많고, 똑같은 모양으로 담았다. 이걸 하나의 접시에 조금씩 감각 있게 담으면 요리의 격이 올라갔을 거다. 이대로는 조금 틀이 덜 잡힌 느낌이다. 지금 국수가 네 덩이 놓여 있는데, 나라면 이걸 두 덩이만 놓겠다. 또 지금 나온 김치는 아까 나왔던 것과 똑같은 종류(배추김치) 아닌가. 코스별로 새로운 걸 내놔야 한다. 요리 초반에 나왔던 물김치도 훌륭했다. 그런 다양한 종류를 선보여야 한다.”

-오늘 이 음식을 프랑스 파리 당신의 레스토랑에 가져가 손님들에게 내놓을 수 있겠나.

“80%는 그대로 가져갈 수 있다. 변형을 하고 다듬기는 해야겠지만 한식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글=전수진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피에르 가니에르(Pierre Gagnaire)=1950년 프랑스 소도시 아피낙의 요리사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음식을 배웠다. 그의 아버지가 소도시 생테티엔에서 운영하던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시작했지만 요리 철학의 차이 때문에 80년 독립해 같은 도시에 자신의 레스토랑을 열었다. 그의 레스토랑은 세계적 레스토랑 평가지인 미슐랭 가이드의 별을 두 개(86년), 세 개(93년) 획득했지만 96년 문을 닫았다. 그 뒤 파리로 자리를 옮긴 그는 97년 ‘피에르 가니에르 레스토랑’을 열었고, 이듬해 미슐랭의 별 셋을 얻었다.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가 미슐랭 별점을 획득한 요리사를 대상으로 한 조사(2008)에서 최고의 요리사로 선정됐다. 지난해 말 롯데호텔에 ‘피에르 가니에르 아 서울(Pierre Gagnaire a Seoul)’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