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분류한 것/스크랩

[스크랩] 노희경이 <봄날은 간다>에 띄우는 연서 / 씨네21에서 발췌

falcon1999 2008. 10. 26. 09:24

출처: http://polie.egloos.com/tb/31262

 

노희경이 <봄날은 간다>에 띄우는 연서 / 씨네21에서 발췌

남녀의 짧은 만남과 사랑, 그리고 길고 아프기만 한 헤어짐의 과정을 담은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는 순수하게 텍스트에 몰입하기 쉽지 않은 영화다. 영화 속의 상우와 은수가 서로 보듬다가도 싸우고 상처받아 혼자마음을 곱씹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은 어느새 자신의 모습이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상우 또는 은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 그 순간 영화 속 주인공들의 마음속에서 이는 대밭의 ‘솨-서-’하는 소리는 고스란히 관객의 몫으로 자리잡는다. “영화를 본 건지 내 이야기를 본 건지 모르겠다”는 관객들의 이야기는 <봄날은 간다>의 이러한 점을 지적하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봄날은 간다>는 분석의 영화라기보다는 공감의 영화이며, 극중 은수가 강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혼자 콧소리로 아련한 멜로디를 자꾸만 흥얼거리게 하는, 매우 ‘감염성’이 강한 영화다.

달콤한 판타지도, 극적인 로맨스도, 눈물샘을 쥐어짜는 자극도 없이 사랑이야기를 속살 그대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그래서 극장의 어둠 밖으로 나왔을 때 더더욱 아련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이 영화를 본 소설가, 방송작가, 영화평론가, 그리고 홍콩의 영화감독이 보내준 글이 작품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 <봄날은 간다>가 만들어낸 마음속의 동심원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고해 또는 독백에 가까운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편집자

둘이 헤어졌다... 다행이다 / 노희경

女子에게 少年은 부담스럽다
아직도 십센티는 더 클 것 같은 소년 유지태와 이제는 사랑을 조롱할 수도 있을 만큼 농익을 대로 농익은 여자 이영애가 커플이 돼서 러브스토리를 들려준다는 게, 처음부터 나는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둘은 헤어졌다. 다행… 이다.

한때는 상우처럼, 지금은 은수처럼.
이제는 기억도 아련한 첫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때,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영화 속의 상우 같았었다. 그처럼 유머를 모르고, 눈치 없고, 맹목적이고, 답답했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장면 하나, 눈오는 날 추리닝에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그의 집 창문 앞에서 오기를 부리며 떨고 있던 내 모습. 그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도 은수처럼 표독(?)했었다. 꽁꽁 언 발을 번연히 보면서도 그는 끝끝내 제 방으로 나를 이끌지 않았다.

이별에 대한 선전포고를 이미 했으니 그뒤의 감정수습은 모두 내 몫이라는 투였다. 당시엔 그 상황이 너무도 서러워 코끝이 빨개지게 울었었는데, 이제 그 추억은 그냥… 멋적을 뿐이다. 인생을 살면서 절대 잊혀질 것 같지 않은 장면들이 잊혀지고, 절대 용서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용서되면서 우리는 여자로 혹은 남자로 성장한다. 누구는 그러한 성장을 성숙이라고도 하고, 타락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다만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무조건 어른이 되고 싶던 비린 미성년 시절, 나는 찐한 사랑 한번에 여자가 될 줄 알았었고, 실연은 절대로 안 당할 줄 알았었다. 이제는 그런 내 바람들이 당치 않은 기대였던 것을 안다. 사람들은 언제나 당면한 입장에 서서 상황을 이해하는 생리가 있다. 상우의 나이를 지나 은수의 나이에 서니, 상우보단 은수가 이해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순리다.

‘라면이나 먹자’, ‘자고 갈래’라고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은수의 말을 이해 못하고 정말 라면이나 먹고, 잠이나 자는 상우는 어쩌면 처음부터 은수에겐 버겁게 순수한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날긋하게 닳은 여자에게 순수는 반갑지 않다. 순수가 사랑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모르는 사람만이 순수를 동경한다. 사랑이 운명이나 숙명이 아닌 일상의 연장선에 있다고 믿는 대개의 경험있는(상대를 바꿔가며 사랑의 열정을 몇번씩 반복해서 느껴본) 사람에게, 순수는 정돈된 일상을 방해하고, 그로 인해 사랑을 좀 슬게 한다.

상우의 순수가 은수의 일상을 방해하고 사랑을 버겁게 느끼게 하는 요소는 곳곳에 있다. 늦잠을 자고 싶은데 상우는 제가 한 밥을 먹으라고 재촉하고,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데 새벽녘 서울에서 강릉길을 한달음에 달려와 포옹을 요구하며, 맨정신으로 약속을 하고 찾아와도 안 만나줄 판에 술 취해 급작스레 찾아와 철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른다, 게다가 엉엉대며 울기까지. 그 대목에 이르면 은수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도 은근슬쩍 짜증이 인다. 저만 아프고 저만 힘들지. 어린 남자는 그렇게 이기적이다.

사랑만 하기에 인생은 너무도 버겁다
다수의 사람들은 은수가 상우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 현실적인 가치기준의 잣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박봉에 초라한 개량 한옥에서 사는, 홀시아버지와 매서운 시고모를 옆에 두고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모셔야만 하는, 정말 누가 봐도 최악의 결혼조건을 가진 그 남자와 연애는 몰라도 결혼은 절대 할 수 없다는 계산이 은수에게 있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 이유에 반박한다. 은수는 그 남자의 처지보다 순수가 버거웠을 것이다. 사랑이 변하고, 권태가 일상이 되고, 키스도 무료해지고, 생계가 치명적인 걸 이미 아는 여자에게 사랑만이 전부인 남자는 부담스러울 뿐이다.

이제 이 나이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상우처럼 묻는 남자가 내게 온다면, 나 역시 은수처럼 당연히 그 남자를 피해갈 것이다. 아직도 사랑이 안 변한다고, 사랑이 전부라고(직장마저 그만둘 만큼) 생각하는 남자와 격한 인생의 긴 여정을 어찌 헤쳐나가겠는가. 은수와 상우의 결별은 그런 의미에서 너무도 다행한 일이다.

드라마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즈음 한국영화의 눈부신 발전은 그닥 반갑지 않은 일이다. 안 그래도 적은 배우진이 너도나도 영화를 한다고 다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소원해서 될 일이라면 한국영화의 추락을 두손 모아 기원이라도 할 판이다. 그런 내 기원을 영화 <봄날은 간다>는 무참히 만든다. 드라마가 살길은 영화의 추락이 아니라 드라마의 발전밖엔 없다는 결론이 씁쓸하게 나를 채찍질한다.

노희경/드라마작가·<바보같은 사랑>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