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마지막이다. 마지막이기에 후회 없이 달리고 싶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38·삼성전자)는 2008베이징올림픽이 각별하다. 이봉주에게 이번 올림픽 마라톤 풀코스 도전이 마지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봉주는 한국 최고 마라톤 스타로 ‘국민 마라토너’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올림픽에서는 불운했다. 1996년 애틀랜타대회부터 2000년 시드니대회, 2004년 아테네대회까지 3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금메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첫 도전인 애틀랜타 대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이후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봉주는 어느 새 만 38세의 나이가 됐다.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전체 선수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아 화제가 될 정도로 세월이 흐른것. 지난 2004년아테네올림픽에서 이봉주가 2시간15분33초로 14위에 그치자 국민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한국의 대표 마라토너로서 ‘할 만큼 했다’는 뜻이었다. 거기에는 올림픽에서 더 이상 이봉주를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일어서는 것이 이봉주의 마라톤 인생이었다. 이봉주가 애틀랜타올림픽 이후 슬럼프를 겪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은퇴를 예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봉주는 1998년 로테르담대회에서 2시간7분44초의 한국기록을 세우며 재기에 성공했고,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우승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불운을 겪으며 24위에 그친 뒤에도 더 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2001년 세계 최고권위의 제105회 보스턴마라톤에서 월계관을 썼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1위에 오르며 아시안게임을 2연패했다.
2004아테네올림픽에서 14위에 그쳤을 때는 공공연히 은퇴설이 돌았다. 당시 나이 34세. “2008 올림픽에도 도전하겠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들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2007년 제78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2시간8분4초의 기록으로 우승하며 살아있음을 알렸다.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선수단은 금메달수를 최소 6개에서 최대 12개로 전망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훈련본부가 점친 ‘금메달 시나리오’에 따르면 양궁과 태권도, 그리고 역도-수영-레슬링-유도-베드민턴-체조 등으로 금메달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난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낸 후 매번의 올림픽 때마다 금메달 시나리오에 올랐던 ‘마라톤’이 빠졌다.
이봉주를 지도하고 있는 오인환(49) 마라톤대표팀 감독도 이번 올림픽에서의 성적을 예상해 달라는 질문에 신중한 태도다. 오 감독은 “지금까지 세계 유수의 마라톤 전문가들이 올림픽 마라톤 우승후보를 점치곤 했지만, 한 번도 들어맞은 적이 없다”면서 “개인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훈련과정이 좋다고 해서 반드시 금메달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마라톤 종목에는 경기 당일 운이 크게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오 감독은 “남자부에 참가할 70~80명의 국가대표 선수들 중 30~40명이 메달에 도전할 수 있다”며 누구든지 우승후보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결국 한국 대표팀의 기대주 이봉주의 메달 가능성에 대해서도 역시 확답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베이징올림픽 남자 마라톤은 24일 오전 7시30분 열린다. 아침 일찍 레이스가 시작되지만 기온은 섭씨 32~34도로 예상된다. 가장 큰 변수는 역시 날씨인 셈이다. 베이징올림픽 남녀 마라톤 경기는 텐안먼 광장을 출발해 텐탄공원~융딩먼~금융가~중관춘~베이징대·칭화대 캠퍼스를 거쳐 주경기장인 국가체육장으로 골인하는 42.195㎞에서 펼쳐진다. 대체로 평탄한 코스지만 체력이 고갈되는 35㎞ 지점이 오르막길이라는 게 무더운 날씨와 더불어 또 다른 변수다.
이봉주는 “마지막을 명예롭게 정리하고 싶은 욕심은 있다. 하지만 변수가 워낙 많고 날씨가 덥기 때문에 섣불리 (목표를) 말하기는 어렵다. 오직 내 갈 길만 간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그는 “언제부턴가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스가 끝나면 바로 다음 대회를 생각한다. 1990년 전국체전 때 풀코스에 처음 도전해 19년째 달리고 있다. 피니시 라인을 통과할 땐 ‘이짓 다시 하나 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언제나 제자리다”고 말한다. 그는 매일 보약을 챙겨 먹는다. 붕어 진액과 울금액, 홍삼액, 산양삼액 등은 마흔을 눈앞에 둔 베테랑 마라토너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는 “운동을 시작한 뒤 보약을 끊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요즘은 “힘내라”고 주위에서 보약을 보내 줘 약값은 들지 않는다. 달릴 때 응원해 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 절대 멈출 수 없단다.
“이제 그만 달리지”라고 타박을 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봉주를 높게 평가하는 육상인들도 있다. 그는 1990년 첫 완주를 시작으로 40번의 풀코스(42.195㎞)를 도전해 38번 완주하며 19년째 달리고 있다. 오인환 감독은 “이봉주는 하루에 매일 평균 30㎞를 달린다. 1년에 1만950㎞를 달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서울~부산(450㎞)을 24번쯤 달리는 셈이다”고 말한다.
‘왜 달릴 수밖에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마라톤은 직업입니다. 직업적으로 하니까 달릴 수밖에 없지요. 가장 잘 하는 것도 달리는 것이고요”라고 했다. 이봉주에게 마라톤은 생활이다. 그는 “오래 달릴 수 있는 비결은 편안하게 생활하는 것처럼 꾸준히 하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이봉주가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이 아닌 금메달을 땄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는 “그때 금메달이었으면 지금 이러고 있을까요. 그때 은메달이었으니까 지금의 제가 있겠지요”라고 했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을 걸면, 그때 달리기를 멈추겠다”는 말로 다시 각오를 밝힌다.
이봉주는 8월1일까지 한 달 동안 도로달리기 훈련 여건이 완벽한 일본 치토세에서 훈련했다. 5일 중국으로 이동한다. 베이징이 아닌 다롄에 훈련캠프를 차린다. 이곳은 3개월 전 오인환 감독이 일찌감치 물색해놓은 곳이다. 대기오염이 심한 베이징 대신 현지와 같은 날씨에 적응하면서 마지막 조정 훈련이 가능한 훈련지다.
다롄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이 식이요법이다. 이봉주는 대회 7일을 앞두고 소금을 치지 않은 등심을 세끼 모두 구어 먹을 예정이다. 보통 ‘카보 로딩’(carbo loading · 탄수화물 축적하기)으로 부르는 이런 식이요법은 온 몸에 축적돼 있는 글리코겐을 모두 소진한 다음, 대회에 임박해 글리코겐을 만드는 탄수화물을 집중적으로 섭취해 달리기에 필요한 영양분을 충분하게 축적하는 특별한 식사법이다. 일반적인 카보 로딩은 3일간 소금을 치지 않은 지방질이 없는 살코기와 계란 등을 집중적으로 먹고, 4일째부터 대회 하루전까지는 탄수화물이 많이 있는 찰밥, 빵, 감자, 자장면 등 국수류를 집중적으로 먹는다. 마치 휴대전화 전지의 전력을 모두 소진한 뒤 충전하는 것이, 반쯤 쓴 전지를 다시 충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전력을 충전할 수 있는 원리와 같다.
오인환 감독은 “마라톤은 회복력이 관건”이라면서 “이봉주의 몸은 타고났다”고 했다. 인간은 주에너지원으로 탄수화물을 사용한다. 이때 젖산이 분비돼 피로도를 증가시킨다. 마라톤은 젖산이 생성됨과 동시에 젖산이 분해되는 과정이다. 이봉주는 “훈련 중 혈액 내 젖산농도를 측정해 봐도 젊었을 때와 큰 차이가 없다”면서 “과학적으로도 몸은 건재하다”며 웃었다.
세계적인 마라토너 가운데는 30대 중·후반 선수들이 많다. 세계기록(2시간4분26초)보유자 하일레 게브르셀라시(35·에티오피아)를 비롯해 아시아 기록(2시간6분16초) 보유자 다카오카 도시나리(38·일본), 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스테파노 발디니(37·이탈리아), 2003 베를린마라톤대회에서 사상 최초로 2시간5분벽을 깬 폴 터갓(39·케냐) 등이 모두 현역이다. 오 감독은 “노장선수라도 체력이 떨어져서 못 뛰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마라톤이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상대선수와의 치열한 두뇌싸움이 펼쳐진다. 어느 대회든 30~40㎞ 사이에서 승부가 갈린다. 이 때까지는 선두그룹에 속하는 것이 목표. 사전 작전은 있지만 상황은 가변적이다. 레이스 도중 감독이 주요 길목에서 지시를 할 수는 있지만 이것 또한 제한적. 결국 승부를 거는 포인트는 선수가 판단한다. 이봉주는 “상대의 표정, 숨소리, 팔 동작까지 파악하면서 뛴다”고 했다. 이봉주가 턱수염을 기르고 선글라스를 쓰는 이유도 상대에게 표정을 읽히지 않기 위함이다.
올림픽 마라톤은 이변의 연속이었다. 서울올림픽 젤린도 보르딘(이탈리아), 바르셀로나올림픽 황영조, 애틀랜타올림픽 조시아 투과니(남아프리카공화국), 시드니올림픽 게자행 아베라(에티오피아)는 모두 금메달후보가 아니었다. 올림픽 판도가 안갯속인 이유는 올림픽이 기록싸움이 아니라 순위 싸움이기 때문. 서울올림픽부터 최근 5개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들은 모두 2시간10분벽을 깨지 못했다. 오 감독은 “이번에도 9분대에서 메달이 갈릴 것”이라고 했다. 올림픽 우승자 가운데 노장들이 많은 이유도 순위경쟁에서는 레이스 운영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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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부는…
▲1970년 충남 천안 출생 ▲1984년 성거초등학교 ▲1987년 천성중학교 ▲1990년 광천고등학교 졸업 ▲1990년 제71회 전국체육대회 마라톤 풀코스 완주 2위 ▲1994년 서울시립대학교 졸업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 은메달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마라톤 금메달 ▲2000년 토쿄 국제마라톤 2위(한국 최고기록 2시간07분20초) ▲2001년 제105회 보스턴 마라톤 우승 ▲2004년 아테네올림픽 마라톤 14위 ▲2007년 서울국제마라톤대회 우승 ▲2008년 제29회 베이징올림픽 육상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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