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심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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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일 베이징 국가올림픽체육센터에서 열린 한국 여자핸드볼 B조 예선 첫 경기 러시아전에서 김온아가 수비를 피해 슛을 시도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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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볼 세계 무대에서 아홉골의 차이는 이미 승부의 추가 한참이나 기울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상대는 세계선수권대회 2연패(2005·2007)의 위업에 빛나는 명실상부한 세계 챔피언 러시아였다.
점수차가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후반전, 러시아의 큰 선수들 사이에서 힘겹게 몸싸움을 펼치던 피벗 플레이어 허순영이 두번째로 2분 퇴장의 징계를 받으며 우리 선수들은 그렇게 힘없이 끌려갔다.
영화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가슴 먹먹한 장면을 떠올리며 응원하던 사람들은 '이대로 30대 아줌마들의 체력적인 한계를 느끼고 돌아서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앞섰을 것이다. 하지만 악바리 정신으로 뭉친 그녀들은 결국 우리들을 또 한번 감동의 물결로 이끌었다.
임영철 감독이 이끌고 있는 우리 여자핸드볼대표팀은 9일 낮 베이징 올림픽센터 체육관에서 벌어진 2008 베이징올림픽 여자핸드볼 B그룹 러시아와의 첫 경기에서 29-29(전반 13-16)로 비기며 명승부를 펼쳤다.
골잡이 카리에바-문지기 시도로바, 둘 다 미워!
MBC TV 여자핸드볼 해설을 맡은 임오경(서울시청 감독)씨는 후반전 경기중 상대의 핵심 골잡이 아나 카리에바의 별명 '점박이'까지 거론하며 러시아팀이 상대하기 버거운 상대임을 거듭 강조했다.
182㎝의 큰 키를 자랑하는 아나 카리에바는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우리 선수들 둘 정도는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 가볍게 따돌리며 높은 골 결정력(5/6, 83%)을 자랑했다. 두세 명이 갑자기 상대 선수에게 달려들며 협력 수비를 펼치던 우리 선수들은 카리에바 앞에서는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체격적인 면에서 모자란 것은 어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 골문을 지킨 마리아 시도로바는 우리 선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놀라운 선방을 열여섯번이나 기록했다. 그녀를 향해 우리 선수들이 던진 41개의 슛 숫자를 생각하면 39%라는 방어율은 이 경기의 긴박했던 상황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기록이었다.
전반전 15분경 우리 선수들은 몸을 아끼지 않는 투혼을 발휘하며 두세골 차로 앞서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그 때마다 시도로바를 향해 눈을 흘겨야 했다.
경기 종료 직전 우리 문지기 오영란의 놀라운 선방에 이은 마지막 공격에서 센터백 오성옥이 젓먹던 힘을 다해 뛰어오르며 오른손 슛을 던졌지만, 역시 시도로바가 버틴 러시아 골문은 역전 결승골을 내주지 않았다.
스무 살 김온아, 이모같은 언니들 앞에서 펄펄 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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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핸드볼큰잔치에서 점프슛을 날리는 김온아. 베이징 올림픽 러시아 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
ⓒ 심재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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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팀의 간판 문지기 오영란과 소속팀(벽산건설)이 같은 새내기 센터백이 이번 대회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 여자핸드볼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스무살 센터백 김온아가 바로 그 주인공.
오영란과 김온아는 무려 열여섯살이라는 차이가 나지만 소속팀 말고 또 하나가 일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딱 한달 뒤로 다가온 생일(9월 6일)이다. 뛰는 자리는 다르지만 이모 같은 언니 오영란에 비해 딱 16년만에 태어난 여자핸드볼의 미래다.
전반전 중반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또 한분의 맏언니 오성옥을 대신하여 뛰기 시작한 김온아는 만리장성을 떠오르게 만들 정도로 높은 러시아 선수들의 큰 체구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과감한 돌파 의지를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여자핸드볼의 미래를 위해 큰 경험이었다.
또 한편의 드라마가 된 후반전은 김온아를 위한 30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팬 입장에서 스무살의 센터백이 이끌고 있는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을 상상하기에는 조금 이르다는 느낌이 지배적이었지만 겁없는 김온아는 이러한 의식을 보기 좋게 깨뜨려주었다.
우리팀의 열네번째 득점이자 후반전 첫 득점부터 김온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의 주 득점원은 7m 던지기(페널티 드로)였다. 전반전 홍정호와 최임정의 7미터 던지기 하나씩이 상대 문지기 시도로바의 선방에 막히자 임영철 감독은 과감하게 그 역할을 김온아에게 맡겼다. 감독의 이러한 믿음은 기적이나 다름 없는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결승전 같은 감동... 다시 독일을 넘어야
거침없이 골을 터뜨리던 김온아는 경기 종료 7분 40초를 남겨놓고 피벗 김차연이 힘겹게 만든 7m 던지기를 성공시키며 26-26을 전광판에 아로새겼다. 17-26에서 동점이 될 때까지 러시아 선수들은 처음 보는 김온아의 빠른 몸놀림에 혼을 빼앗긴 듯 보였다. 이에 러시아 벤치를 맡은 트레필로프 감독은 침을 튀면서까지 선수들에게 큰 소리를 지를 정도로 화를 내기에 이르렀다.
센터백 김온아와 왼쪽 날개 안정화, 오른쪽 날개 박정희는 경기 끝무렵 좋은 수비에 이은 빠른 공격을 주도했고 보는 이들 모두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29-29의 명승부를 연출했다. 다른 팀에게는 너무나 미안한 말이지만 이 첫 경기를 그냥 결승전으로 대체하고 싶을 정도로 감동이 밀려왔다.
우리 선수들은 이제 월요일(11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또 하나의 큰 산인 독일을 상대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메달이고 뭐고 생각할 것 없이 집으로 데려와서 편하게 휴식을 주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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