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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숲이 건강이다](27)아이 나무 함께 크는 '도심 허파'

falcon1999 2008. 9. 29. 11:33

[숲이 건강이다](27)아이·나무 함께 크는 ‘도심 허파’
입력: 2007년 02월 15일 09:30:57
아이들은 소나무 밑에서 솔방울을 잔뜩 주워서 오른쪽 주머니에 가득 채웠다. 그리고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살펴본다. 손잡이가 될 만한 곁가지가 있는 것을 찾아서 장난감 총으로 손에 들고, 또 적당한 길이의 가지는 왼쪽 허리에 칼처럼 차고서 친구들과 뒷동산 숲으로 향했다. 그리곤 해질 무렵 부모님의 부르는 소리에 아이들은 숲에서 나와 집으로 왔다. 찢어진 옷은 “산초나무가시가…”, 손등의 붉은 점은 “옻나무가…”, 팔뚝의 생채기는 “껍질이 거친 상수리나무를 오르다…”, 입가의 검은 얼룩은 “오디(뽕나무 열매)를 따먹다가…”. 아이는 어머니의 핀잔에 숲의 나무 이름을 들먹이며 줄줄이 사유를 둘러댔었다.

서울타워에서 내려다 본 남산과 서울 시내 전경. 서울 시가지 한복판에 자리잡은 남산은 도심의 마천루 속에서 허파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어떤 아이들은 토요일이면 어른들의 손을 잡고 물통과 식물도감, 그리고 뭔가 잔뜩 써서 채워야 할 공책을 들고 비장한 표정으로 체험을 위해 수목원과 공원과 숲을 찾아 나선다. 입구에서 설명하는 ‘숲에서 해야 할 일’을 한쪽 귀로 흘리며 숲으로 들어가지만, 정작 관찰 울타리 너머 저만치 있는 하늘만큼 키가 큰 나무를 향해 목을 뒤로 젖혀 올려다보기만 할 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되면 친구와 같이 공책만 채우려 애쓴다. 열심히 나무 이름을 외고 있던 아이는 큰 발견의 질문을 던진다. “아저씨 나무는 원래부터 저렇게 컸어요?” “잎은 원래부터 높은 곳에만 있어요?”얘들아 미안하구나! 할말이 없다.

놀면서 저절로 배우는 나무와 숲을 도시에서는 부모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르치고 경험하게 해줘야 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다. 도시의 아이들 가까이 많은 나무와 숲이 필요하듯이 ‘좋은 숲’, 아이들이 저절로 배울 수 있는 ‘친구 같은 숲’이 무엇인지 이제는 생각해볼 때이다.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도시숲’이라는 말은 참 엉뚱한 말이다. ‘도시’는 ‘편리’하게 살기 위한 곳이기에 아파트 수도꼭지에서는 항상 뜨거운 물이 나오고, 밭둑 한번 밟지 않아도 깨끗한 먹을거리가 우리를 기다리는 ‘풍요’함을 준다. 게다가 베란다의 화분 옆에서 차를 마실 수 있는 부족하나마 반쪽짜리 ‘인간다운 삶’도 제공한다. 그러나 ‘숲’은 편리한 곳이 아니다. 신발은 더럽혀지고, 방심하면 나뭇가지가 얼굴을 때리고, 징그러운 벌레도 있다. 게다가 진짜 숲을 보려면 한참을 나가야 한다. 하나는 ‘인공’이라 하고 또 하나는 ‘자연’이라 불리며 부딪히면 으르렁거리는 두 말이 웃기게도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엉뚱한 두개를 모두 가지려고 하는 것이 도시숲이다.

그런데 편리함과 풍요로움, 그리고 인간다운 삶은 사실 함께 하기가 참 힘들다. 1년 농사의 힘든 노력으로 마당에 쌓아놓은 곡식을 보면 풍요로움으로 가득 차지만 편리한 삶은 아니었다. 그 풍요로운 곡식을 이웃과 나누지 못하는 삶이라면 인간다운 삶은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도시숲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도시에 숲이 있으면 편리할까? 풍요로울까? 아니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풍요롭고 편리하며 인간다운 삶을 제공하는 도시숲은 단연코 없다. 그런데 우리는 만들고 있다. 숲은 걷고 숨쉬게 해주며, 도토리를 입에 문 다람쥐가 내 앞길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에서 ‘온전한 인간다운 삶’을 알게 해주는 곳이지만, 울창하고 풍요로운 숲을 내 집 가까이 가지려면 많은 세월과 힘든 일이 필요하다. 전혀 ‘편리’하지 않다. 그런데 실상은 무척 편리하다. 어느 날 갑자기, 지루한 기다림과 힘든 노력도 없이 누군가 나 대신 하늘만큼 큰 나무로 가득 찬 숲을 만들어 주고, 만든 후에는 ‘자연’인 나무와 숲을 도시민이 좋아할 것이라는 억측으로 깨끗이 쓸고 담아 ‘인공’을 만든다. 어떤 이는 ‘잘 관리된 숲’이라 부른다. ‘잘 관리된 인공적인 자연’-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이 말이 지금 도시숲에서 벌어지고 있다.

몇년 전 만난 호주 국립대 도시숲 연구팀 크리스 블락 교수는 충격적인 호주의 경험을 알려주었다. 1960년대 새 수도인 캔버라를 위해 온 도시에 ‘하늘만큼 큰 나무’들을 옮겨 심어 도시숲을 만들었는데 그 큰 나무들이 2050년 이전에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몇백년을 가야 할 나무들이 백년도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대신할 작은 나무를 다시 심고 있었다.

우리는 도시숲을 너무 어렵게 보고 있다. 숲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 이른 봄 연둣빛의 새싹과 여름날의 싱싱한 초록, 가을의 투명한 단풍만 있다면 좋다. 때가 되면 나비와 새와 다람쥐가 찾아와서 더 좋다. 그 매력에 더 좋은 숲을 찾아 공부도 하고 노력도 한다. 그런데 가끔씩은 알 수 없거나, 굳이 알 필요도 없는 것을 찾기 위해 엉뚱한 노력을 한다. 숲을 숲으로 받아들이면 저절로 배우게 될 것을 틀에 넣어서 교육하고 학습하고…. 그러다 보면 진짜 숲을 아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노력을 위해 숲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시의 아이들은 숲에서 놀고 즐기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학교와 크고 작은 모임에서 숲 공부와 놀이를 ‘배우려’ 애태운다. 저절로 알게 될 것을 억지로 가르치고 배우려하는 참 어이없는 노력이 벌어진다. 시골집 가까이에 숲이 있고 해가 지도록 놀다가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혼나고, 또 삐쳐서 그 숲에 다시 숨고, 나무통을 끌어안고 투덜대고 그러다 나무껍질에 나만의 기호들도 남기며 ‘우리 둘만의 비밀’을 남겨 두기도 했었다.

하지만 도시의 아이들은 나무와 숲에서 무엇을 하는가? 그렇게 친구처럼 어울리고 함께 놀기보다는 어른들의 잣대로 ‘나무를 숭상’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지는 않는지? 생태라는 품위 있는 말로 어른들이 포장한 숲이기에 아이들에게 어렵게 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기어오르고 매달리고 올라타 보면 이름과 잎과 껍질의 거칠기는 저절로 알게 될 것을 멀리서 우러러 보며 조심스레 관찰하는 희귀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그렇게 도시의 나와 아이들이 인간다운 삶으로부터 스스로 달아나게 만들고 있다.

나무와 숲은 살아있다는 것을 어른들은 잊은 것 같다. 어린 나무를 심으면 시간이 흘러 크게 자라고, 병들어 힘들어하기도 하고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 나무는 쓰러져 다시 흙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편리’하게도 도시숲에서 원하는 것은 어린시절 없이, 다 자란 큰 나무가 성큼 걸어 들어오고, 더 이상 아프지도 말고, 외과수술로 늙어 쓰러지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도시의 아이들에게 가짜의 숲으로 가르치고 있다.

영국 교육부는 1990년대 초 좋은 결단을 내린다. 연약한 아이들의 피부는 강한 햇볕에서 30분 이상 노출되면 위험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LTL(Learning Through Landscape-자연을 통한 학습)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아이들과 함께 작은 나무를 심어 학교숲을 만들고 스스로 가꾸며, 인근 도시숲과 연계하여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물을 접하게 하여 자연을 저절로 깨닫게 하고 건강도 지키게 하고 있다.

다 자란 큰 나무를 집 앞 길에 심으면 우선 보기에는 풍요롭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인간다운 삶에서는 미래가 빠질 것이다. 새봄의 새싹을 보기에는 나무의 가지와 잎은 키보다도 훌쩍 큰 저만치 높은 곳에 있고, 동요에는 나무처럼 쑥쑥 자라라고 하는데, 쑥쑥 자라는 나무는 볼 기회도 없이 하룻밤 사이에 신비롭게도 누군가에 의해 나타난 ‘하늘만큼 큰 나무’는 나와 아이들의 나무가 아닌 딴 세상의 나무가 되어 버린다. 아이들 키에 알맞은 작은 나무가 필요하고, 올라타고 매달릴 나무가 필요하고, 놀다가 저절로 알게 될 그런 도시숲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작은 나무는 우리가 사라진 후에 ‘올곧은 하늘만큼 큰 나무’가 되어 수백년 동안 이 도시에서 아이들을 지킬 것이다.

〈권진오|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태과〉